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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 그래라는 말

생산현장과 개발 조직을 지나며 반복해서 본 '생각하지 않고 버티는 방식'과 피드백 루프의 부재에 대해 정리한 에세이다.

1. 19살, 첫 현장

내가 처음 현장에 들어간 건 열아홉 살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이었다. 병역특례 때문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어린 나이였는데, 그때는 내가 어리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다. 그냥 당장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일을 해야 했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나는 공무팀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전기나 기계 설비를 보고, 고장이 나면 고치고, 그런 일을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보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라인 오퍼레이터였다. 기계를 보고, 반복 작업을 하고, 라인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 이해했나 싶었다. 회사가 원래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그때의 나는 계약이 뭔지, 직무가 뭔지, 회사가 사람을 어떻게 굴리는지 잘 몰랐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설명할 말은 없었다. 화가 나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다. 속으로는 욕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웃고 넘겼다. 어리기도 했고, 병역특례라는 조건도 있었다. 쉽게 나갈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다.

라인 오퍼레이터 일은 정신이 없었다. 계속 기계를 보고 있어야 했고, 반복되는 작업을 따라가야 했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뭔가를 이해하고 판단하면서 일한다기보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흐름에 나를 밀어 넣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루가 끝나면 내가 뭘 배웠는지보다, 오늘도 어떻게든 끝냈다는 감각이 더 컸다.

한 6개월쯤 그렇게 일하다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제야 회사는 나를 공무팀으로 옮겨줬다. 그런데 공무팀에 갔다고 해서 갑자기 일이 체계적으로 풀린 것도 아니었다. 일을 가르치는 방식은 여전히 이상했다. 질문하면 귀찮아했고, 옆에서 보고 알아서 배우라는 식이었다. 실수하면 그때는 뭐라고 했지만, 왜 실수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네가 알려달라고 붙잡고, 뭐라도 사주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참 더러웠다. 내가 일을 배우러 온 건지, 사람 비위를 맞추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을 가르치는 것도 체계가 아니라 관계였고, 기준이 아니라 눈치였다. 내가 어린 마음에 더 억하심정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배운다는 느낌보다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더 컸다.

그곳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원래 다 그래.” “사회생활이 그런 거야.” “버티면 돼.” 그때는 그 말들이 나를 누르는 말처럼 들렸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린 사람한테, 선택지가 좁은 사람한테, 회사가 원하는 방식대로 적응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속으로 계속 이를 갈았다. 병역특례라 어차피 못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이 일을 그냥 내가 안 좋은 회사를 만난 경험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로 첫 회사는 엉망인 구석이 많았다. 약속과 다른 일을 시킨 것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도, 어린 사람을 만만하게 본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이 경험을 그것만으로 쓰고 싶지는 않아졌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을까. 왜 일을 가르치는 대신 알아서 버티라고 했을까. 왜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고, “원래 다 그래”라고 넘겼을까. 그때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그 사람들 개인만의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말 뒤에는 오래된 회사 문화가 있었고, 살아남는 방식을 먼저 배운 사람들의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내게 첫 현장은 단순히 사회생활이 힘들었다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곳은 내가 처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버티는 방식”을 본 자리였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방식이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지를 처음 배운 자리였다.

2. 큰 회사에 가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

처음 회사가 이상했던 건, 그냥 그 회사가 작고 엉망이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체계가 없고, 사람을 막 쓰고, 일을 가르치는 방식도 오래됐으니까. 그래서 마음 한편에는 큰 회사에 가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사람이 많고, 시스템이 있고, 이름이 있는 회사라면 적어도 배울 만한 체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산현장 커리어의 마지막에서 나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아는 큰 식품 회사의 생산 현장에 갔다. 내가 있던 곳은 냉동식품 생산라인이었다. 확실히 첫 회사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처음 회사처럼 모든 게 노골적으로 엉망이라는 느낌은 덜했다. 조직은 더 컸고, 절차도 있었고, 이름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것도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훨씬 정돈된 회사처럼 보였다.

그런데 현장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의미에서 비슷한 공기가 있었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꼭 책임이 분명한 건 아니었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실제로 체계가 작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많고 직급이 많을수록, 어떤 일은 더 쉽게 공중에 뜰 수 있다는 걸 봤다.

한 번은 테스트 쌀의 향방이 문제 된 적이 있었다. 내가 부산에 출장 갔던 시기였고, 그동안 누군가는 그걸 관리하고 있어야 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그 내용이 제대로 인수인계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고, 아무도 제대로 넘겨주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이 비기 시작하자, 갑자기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대리급도, 과장급도, 부장급도 다 비슷했다. 누구 하나 먼저 “이건 내가 놓쳤다”거나 “여기서 인수인계가 끊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들 한 발씩 물러나 있었고, 책임은 아래로 흘렀다. 그때 내가 느낀 건 단순한 억울함만은 아니었다. 아, 여기도 결국 비슷하네 하는 느낌이 더 컸다. 회사가 크다고 해서 일이 더 잘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무엇을 놓쳤는지가 더 분명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많으니까 책임이 더 잘 퍼지고, 결국 제일 말하기 쉬운 사람에게 모일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문제는 작은 회사냐 큰 회사냐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작은 회사에서는 무질서가 더 노골적으로 보였다면, 큰 회사에서는 그 무질서가 더 정돈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서도 있고 절차도 있는데, 정작 일이 잘못됐을 때는 아무도 그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는지보다, 누구에게 넘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일을 겪으면서 “배울 사람이 없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게 됐다. 피드백 루프가 없다는 말이 더 맞았다. 일이 잘되면 왜 잘됐는지 묻지 않고, 일이 잘못되면 왜 잘못됐는지 끝까지 보지 않는다. 그러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사람은 남는데 학습은 남지 않는다. 경험은 쌓이는데, 그 경험이 다음 판단을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한다.

체계라는 건 문서가 있는 상태나 직급이 촘촘한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 것 같다. 진짜 체계는 일이 비었을 때 그 빈자리가 어디서 생겼는지 추적할 수 있는 데 있어야 한다. 누가 책임질지를 정하는 데만 있지 않고,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를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본 많은 현장에서는 그 부분이 자주 빠져 있었다.

그래서 큰 회사에 가서 실망한 건, 기대했던 완성된 시스템을 못 봐서만은 아니었다. 더 크게는, 많은 사람과 많은 직급이 있어도 여전히 생각하지 않고 책임을 흘려보내는 방식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첫 회사에서는 그걸 거칠고 노골적인 형태로 봤다면, 큰 회사에서는 조금 더 정돈된 형태로 본 셈이었다. 하지만 밑바닥의 감각은 비슷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를 끝까지 묻기보다, 일단 넘기고, 버티고, 지나가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3. 그 사람들도 어떤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을 그냥 싫어했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었다.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피하는 사람들, “원래 다 그래”라고 말하면서 이상한 걸 이상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때의 내 눈에는 그들이 그냥 무책임하고 답답한 어른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 장면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됐다. 그 사람들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개인의 성격만으로 설명하는 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었다. IMF가 있었고, 가난이 있었고, 군대식 위계가 있었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질문하는 사람보다 버티는 사람이 살아남기 쉬운 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일을 깊게 이해하는 것보다, 일단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묻는 것보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더 안전했을 수도 있다.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넘기는 쪽이 더 현실적인 태도였을 수 있다.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은 어쩌면 게으른 말이기 전에, 오래 버틴 사람들이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들도 그냥 생각 없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생각할 여유를 빼앗기고, 버티는 쪽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질문보다 적응이 필요했고, 분석보다 순응이 필요했던 시간 속에서 굳어진 습관이 다음 세대에게도 그대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장면을 세대 탓으로만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다. “옛날 사람들은 원래 그랬다”라고 말하면 편하지만, 그 말도 결국 또 다른 방식의 단순화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건 그들이 나빴다는 결론보다, 왜 그런 태도가 자연스럽게 되었는지를 보는 일이다. 그래야 나도 같은 방식으로 굳어지는 걸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현장에서 불편했던 건 단순히 누가 불친절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더 불편했던 건, 왜 그런 방식이 반복되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을 안 가르쳐주는 것도, 책임이 아래로 흐르는 것도, 잘못된 방식이 고쳐지지 않는 것도 이상한데, 그 모든 게 오래된 질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왜요?”라고 묻는 사람은 튀는 사람이 되고, 그냥 적응하는 사람이 더 무난한 사람이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대의 생존 방식이 조직 문화로 굳어진 모습에 가까웠다. 버틴 사람만 남고, 남은 사람들이 버티는 법을 다음 사람에게 가르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대개 명시적인 교육이 아니라 말투와 분위기와 눈치로 전달됐다. “원래 다 그래.” 그 짧은 문장 안에는, 묻지 말고 적응하라는 오래된 요구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예전처럼 단순하게 듣지 않는다. 그 안에는 무책임도 있고, 체념도 있고, 어쩌면 자기 시대를 겨우 통과해온 사람들의 슬픔 같은 것도 섞여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그 말을 이해해주고 끝내고 싶지는 않다. 이해와 동의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과, 그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이 장은 결국 그 사람들을 변호하는 장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비판하기 위한 장이다. 개인의 성격이나 태도만 탓하면 문제는 작아진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시대와 문화와 생존 방식을 보면, 왜 이런 말과 태도가 그렇게 쉽게 반복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간다. 나는 생산현장을 떠났는데, 정말 그 방식도 함께 떠났는가. 아니면 나는 다른 업계에서 비슷한 장면을 다시 보고 있는가.

4. 개발자가 된 뒤에도 같은 문제를 본다

2022년부터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생산현장 세 곳을 거치고, 개발자로도 세 회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업계가 바뀌면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것들도 꽤 많이 사라질 줄 알았다. 생산현장에서는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위계와 관성이 더 노골적으로 보였으니까. 개발 조직은 적어도 말로는 더 합리적이고, 더 많이 설명하고, 더 자주 돌아보는 곳처럼 보였다.

실제로 다른 점은 있었다. 개발 조직에는 코드리뷰가 있고, 회고가 있고, 장애 분석이 있고, 설계 문서가 있다. 잘못된 걸 그냥 감으로 넘기기보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유를 설명하고 기록하는 문화가 있다. 생산현장에 있을 때의 나는 그런 것들이 꽤 부럽기도 했다. 문제를 언어로 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진전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그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하다 보니, 형식이 있다고 해서 고찰이 자동으로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금방 알게 됐다. 코드리뷰가 있어도 왜 이 코드가 문제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통과 의례가 된다. 회고가 있어도 무엇이 실제 실패였는지 끝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좋은 말 몇 줄 남기고 끝나는 행사가 된다. 장애 분석도 마찬가지다. 원인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다시는 같은 판단을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데까지 가지 못하면, 문서만 남고 학습은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개발자가 된 뒤에도 이상하게 익숙한 장면들을 자주 봤다. 말은 다르지만 감각은 비슷했다. 예전 현장에서는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이 있었다면, 개발 조직에서는 “원래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다들 이렇게 합니다”, “베스트 프랙티스가 이거예요” 같은 말이 비슷한 자리를 차지할 때가 있었다. 물론 이 말들은 때로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말이 설명을 대신하는 순간이다. 왜 이 방식이 우리한테 맞는지, 왜 지금 이 선택을 하는지, 실패했을 때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그 말도 결국 또 다른 권위가 된다.

생산현장의 문제와 개발 조직의 문제는 분명 다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업종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환경이 바뀌면 말투와 도구는 바뀐다. 하지만 실패를 끝까지 해석하지 않고, 성공을 자기 이해로 바꾸지 못하고, 권위 뒤로 숨고 싶은 마음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

스타트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타트업이라면 적어도 더 솔직하고, 더 빠르고, 더 현실적으로 배우는 조직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큰 조직보다 위계가 약하고, 역할이 유동적이고, 변화가 빠르니까 그만큼 피드백도 더 직접적으로 돌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의 많은 스타트업도 생각보다 전통적인 회사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직급은 얇아 보여도 눈치가 있고, 자유를 말해도 책임은 아래로 흐를 수 있고, 수평을 말해도 결국 누군가의 말이 설명 없이 정답처럼 굳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한국의 스타트업과 미국의 스타트업, 특히 Y Combinator 같은 곳이 자주 말하는 문화가 무엇이 다른지 자꾸 생각하게 됐다. 정말 다른 건 더 자유로운 복장이나 더 빠른 실행 같은 표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중요한 차이는, 실패를 얼마나 빨리 인정하고, 그 실패를 얼마나 빠르게 학습으로 바꾸고, 그 과정을 개인의 체면보다 우선할 수 있느냐에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 조직의 문제는 느리거나 보수적이어서만이 아니라, 실패를 드러내고 자기 판단을 수정하는 일을 체면과 위계 앞에서 자주 미루는 데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내가 아직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미국 스타트업 안에서 일해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의 모든 스타트업을 본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지나온 자리들에서 반복해서 느낀 건 있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관성으로 돌아가고, 조직은 생각보다 쉽게 형식만 남기고, 자유롭다는 말은 생각보다 자주 책임을 흐리는 말로 바뀐다. 그래서 나는 업계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지 않게 됐다. 생산현장을 떠났다고 해서, 그때 보았던 방식이 저절로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개발자가 된 뒤에야 나는 그 문제를 더 선명하게 보게 됐다. 현장에서는 “왜 이렇게 하지?”라는 질문이 막연한 답답함으로만 남아 있었다면, 개발 조직에서는 그 질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피드백 루프가 없는 조직은 결국 같은 문제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반복은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무엇이 실패였는지, 무엇이 우연한 성공이었는지, 무엇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개발자가 된 뒤 새삼 깨달은 건, 좋은 조직의 기준은 똑똑한 사람이 많은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좋은 조직은 성공과 실패를 해석하는 문화를 가진 조직이어야 했다. 설명 없는 권위가 아니라, 수정 가능한 판단 위에 서 있는 조직이어야 했다. 나는 생산현장에서 그 기준의 부재를 봤고, 개발자가 된 뒤에도 다른 모습으로 같은 부재를 다시 보고 있었다.

5.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일할 것인가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제일 경계하게 되는 건, 결국 나도 언젠가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그 말이 주로 윗세대의 말처럼 들렸다.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 질문보다 적응을 먼저 배운 사람들, 살아남는 법을 먼저 익힌 사람들의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건 나와 무관한 말이 아니었다. 조직 안에 오래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같은 말투와 같은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그 유혹은 늘 있다. 일이 바쁘고, 책임은 많고, 매번 처음부터 설명하기는 번거롭고, 누군가의 질문은 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태도는 이미 굳어 있는 방식을 그냥 답처럼 넘겨주는 것이다. “원래 이렇게 해.” “일단 해보면 알아.” “다들 이렇게 해왔어.” 그렇게 말하면 당장은 편하다. 판단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내 방식이 정말 맞는지 다시 돌아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말을 들으면서 일을 배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말이 사람을 얼마나 작게 만드는지도 알고 있다. 질문을 줄이게 만들고, 판단을 미루게 만들고, 결국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 내가 누군가보다 더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이 다음 사람에게 남기는 게 너무 빈약하다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는 말의 뜻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한때는 좋은 엔지니어라는 게 더 많은 걸 알고, 더 빨리 해결하고, 더 정확한 답을 내놓는 사람에 가까운 줄 알았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엔지니어는 자기 판단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외면하지 않아야 하고, 성공했을 때도 왜 성공했는지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냥 원래 그런 거야”가 아니라 “왜 그런지 같이 보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도덕적인 다짐이라기보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기준에 가깝다. 생각하지 않고 오래 버티는 방식은 조직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사람도 무디게 만든다. 계속 그렇게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이 이상한지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 지점이 무섭다. 문제를 못 푸는 것보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쪽이 더 무섭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일에서만큼은 피드백 루프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일이 잘되면 왜 잘됐는지 보려고 하고, 일이 잘못되면 누구 탓부터 찾기보다 어디서 판단이 비었는지를 보려고 한다. 누군가 질문하면 귀찮아하기 전에, 내가 그 질문을 설명할 수 있는지부터 돌아보려고 한다. 그게 언제나 잘 된다는 뜻은 아니다. 나도 바쁠 때는 대충 넘기고 싶고, 이미 익숙한 말 뒤로 숨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최소한 그 유혹을 경계하는 사람으로는 남고 싶다.

생산현장에서 배운 것 중에는 버텨야 한다는 감각도 있었지만, 그렇게만 버티면 사람이 어떻게 굳어지는지도 있었다. 개발자가 된 뒤에 배운 것 중에는 더 많이 설명하고 기록하는 문화도 있었지만, 형식만 남으면 그것도 금방 빈 껍데기가 된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붙잡고 싶은 건 특정 업계의 방식이 아니라, 계속 해석하고 다시 묻는 태도다.

나는 아직도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불편하다. 아마 그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불편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말 앞에서 불편해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야, 내가 그 문장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내가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을 그냥 시간 때우기로 두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 설명 없는 관습을 넘기지 않는 것, 실패와 성공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버티는 것. 어쩌면 내가 현장과 개발 조직을 거치면서 정말 배우고 싶었던 건 기술 자체만이 아니라, 그렇게 일하는 태도였는지도 모른다.